기도행전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순회선교

에티오피아 선교방문기 (1)

아프리카를 처음 방문 한것은 1986년7월에 WMC 대학생6명을 인솔하고 한 달간 케냐 맛사이 족을 찾은 것이 아프리카 단기 선교의 첫 발걸음이었다. 그 후 주로 동부아프리카 케냐, 탄자니아와 서부아프리카 감비아(세네갈)등을 10여차 방문하였고, 이번에 다시 아내와 함께 동북부에 있는 에티오피아를 선교방문하게 된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이집트(애굽)와 동쪽으로는 소말리아, 서남쪽으로는 수단, 우간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케냐와 탄자니아를 근접하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이며, 에이즈 환자도 수단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 때에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에 군대를 파병한 우방국가 이기도하다. SIM선교부와 함께 수고하고 있는 박종국선교사와 장은혜선교사 부부의 부탁을 받고 이곳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우리부부가 Los Angeles에서 출발하여 London (Heathrow)과 Egypt (Alexandria)을 경유하여 Ethiopia Adis Ababa에 도착하니새벽1:40분이었다. 입국Visa는 공항에서 Visa신청서와 함께 비용을 내니 간단히 나왔다.

박종국 선교사의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며 시차와 장거리 여행의 피곤함도 잊고 아디스 아바바의 밤거리를 달려 선교사댁에 도착하니 어느덧 새벽3시가 넘었다. 우리 부부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꿇었다. 감사기도와 함께 이번 선교사역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에티오피아에서의 첫 밤은 이렇게 짧은 밤이었다. 잠시 눈을 붙힌듯 했는데 어느덧 앞 창문이 훤하게 밝아왔다. 우리 부부는 먼저 무릎을 꿇고 이번 선교사역과 박종국선교사 부부를 위해서 다시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곳에 오니 미국에 있을 때 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선교사 가족과 함께 간단히 아침 예배를 드리고 함께 아침 식사를 나누니 감개가 무량했다. 선교지에 갈 적마다 느끼고 생각했던 일이지만 이곳에 와 보니 다시 우리가 쌀밥과 김치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한국 마켓에서 흔히 살 수 있는 라면, 고추장, 된장, 파, 마늘등 기본적인 한국 음식을 마음대로 살 수 있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밥상위에 놓여 진 음식마다 사연이 있었다. 이 쌀밥은 뉴욕에 계신 어느 성도님이 보내 주신 쌀로 만든 것이고, 이 창란 젖과 김은 이번에 한국에 다녀올 때에 가져온 것이고, 이 김치는 과거에는 배추가 없어서 만들지 못했는데 요지음은 중국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어 중국 사람들 덕에 배추를 살 수 있었고, 고추 가루는 한국에서 보내준 것이고, 이 국을 끓인 된장은 한국에서 어느 성도님이 보내 주신 것이고—, 하나 하나 설명을 듣고 보니 이곳에서는 이렇게 귀한 음식인데, 남은 재고는 얼마나 될까? 우리 부부가 다 먹고 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니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를 않는다. 우리 부부는 조용히 선교사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선교지에서의 어려움을 깊이 마음으로 체험하고 선교사 부부를 위해서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오늘의 일정을 계획하며 TV를 트니 한국 방송이 나온다. 아니 이곳에 까지 한국 TV가 나옵니까? 이곳에서 보게 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방송이 깨끗하게 잘 나온다고 한다. 이 방송은 한국의 온 누리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지를 위한 선교 방송이었다. 이곳 동북 아프리카 아디스 아바바에서 한국 방송을 보고 들으니 감개가 무량했다. 이 방송을 보고난 후 부터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많이 해소되었고 특히 한국말을 계속해서 들으니 너무 기쁘다고 한다. 선교지에서의 한국말 방송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선교사가 살고 있는 주택은 임대를 해서 쓰고있는 주택인데 작으마하지만 비교적 깨끗했다. 앞마당에 나가니 이름 모를 아프리카 초목들과 아름다운 꽃들 그리고 더운 열기가 몸과 마음을 싱그럽게 해 준다.

갑자기 선교사가 오늘 함께 Addis Ababa University를 방문하자고 한다. 오늘 한국에서 모 지방대학 학장이 오셨는데 Addis Ababa University와 자매 결연을 맺기 위한 회의를 하게되어 선교사가 통역 및 Coordinator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총장과 학장과 선교사가 회의를 하는 동안 나와 아내는 대학 켐퍼스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미국이나 한국의 캠퍼스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비교적 넓고 깨끗했다. 그러나 얕은 담 넘어 보이는 아디스 아바바의 거리는 1970년대의 한국 거리와 비슷했다. 회의가 끝난 후 우리는 대학 박물관장의 인도를 받아 한 자료실에 들어갔다. 박물관장의 설명을 들으니 에티오피아의 조상은 솔로몬이라고 한다. 자기들은 시바 여왕과 솔로몬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솔로몬의 후손이라고 자랑한다. 그리고 여러 쪽의 그림과 조각품을 보여준다. 그림과 조각품의 내용은 솔로몬왕과 시바여왕이 합방하는 내용이다.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이것을 크게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은 Black Color(흑인)가 아니고 Coffee Color(진한 갈색)라고 하며,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눈이 크고 얼굴색이 검지 않아 다른 아프리카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자랑한다. 조용히 저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후에는 선교사가 돌보고 있는 한 거리소녀 보호소(Shelter)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약 20여명의 어린 소녀들이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이곳에 기거하고 있는 소녀들은 가출한 소녀들이며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소녀들을 다려다가 돌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선교사 부부와 우리 부부는 저들에게 나누어 줄 음식과 학용품을 마련하여 방문했다. 우리가 찾아가니 어린 소녀들이 마치 부모를 만난 듯 반갑게 뛰어 나온다. 천진난만한 소녀들의 웃는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방에 들어가 먼저 예배를 드리려 하는데 애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한 소녀가 돐도 안된 애기를 안고 있다. 선교사를 쳐다보니 14살된 소녀가 낳은 애기를 이들 소녀들이 함께 키운다고 한다. 14살된 애기 엄마는 먹을 것이 없어서 가출했다가 남자들의 유혹과 강제로 애기를 낳게 되었다고 한다. 14세된 엄마와 애기를 보니 가슴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데 어린 소녀들은 아무일도 없는 듯 웃고 떠들고들 있다. 나는 말씀을 전하고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가지고 간 음식과 다과와 학용품을 나누어 주었다. 너무나 기뻐하며 감사한다. 이 어린 소녀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서 버림받은 이들,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이들, 누가 이 어린 소녀들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까? (눅10:36) 안타까운 마음으로 거리소녀 보호소(Shelter)를 떠났다.

에티오피아 선교방문기 (2)

오늘은 박선교사의 생일이라고 한다, 부인 장선교사의 정성들여 만든 아침 상을 함께 받았다. 상위에놓여진 음식을 보니 평소와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평소와 같이 뉴욕에서 보낸 쌀밥과 한국에서 보낸 창란 젖과 이곳에서 구입한 배추로 담근 김치, 다만 다른 것은 오늘 미역국이 밥상에 오른 것이 특별하다. 이곳에서 미역국은 대단히 귀한 음식이라고 한다. 미역은 한국에서 가져와야 하므로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한 것이라고 한다. 나와 아내는 특별한 맛도 없는 미역국을 먹으면서 미안한 마음과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귀한 미역국을 선교사 가정에서 우리가 먹다니,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마음대로 먹던 미역국이 눈에 아른 거린다. 선교사 생일인데 식사 후에 생일축하 케익(Birthday Cake)이 없다. 왜 케익이 없느냐고 물으니 이곳 아디스 아바바 시내에는 Cake를 파는 빵집(Bakery)이 없고 다만 이곳에 있는 Hilton Hotel과 Sheraton Hotel Bakery 에서만 Birthday Cake을 구입할 수 있으며 몹시 비싸다고 한다. 그래서 준비를 못했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미역국 때문에 미안했던 마음을 생각하며, 우리가 Birthday Cake를 사서 축하하겠다고 제안했다. 선교사 부부와 자녀들이 몹시 기뻐한다. 우리 부부도 함께 기뻐했다. 저녁에 선교사 부부와 함께 Cake를 사러 먼저 Hilton Hotel로 차를 향했다. 그런데 Hotel 입구에 군인들이 가득히 정열해 있다. 이유를 알아보니 아프리카 전 지역의 왕들과 수상들이 회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두 호텔 (Sheraton과 Hilton Hotel) 모두 오늘은 일반인은 출입이 안 된다고 한다. Cake를 사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우리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여기는 아프리카다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 날에야 겨우 Birthday Cake를 사서 생일 축하 케익을 함께 자르며 축하 할 수 있었다.

오후에는 선교사 부부와 함께 우리 부부는 Aids 환자 수용소를 방문했다. 수용소는 감옥 같이 비교적 높은 벽이 둘려쳐저 있고, 문 입구에 오니 여러 명의 남루한 옷을 입은 Homeless 들이 땅에 누어있다. 선교사가 귀띰해 준다. 수용소가 많원이 되어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Aids 환자들이라고 한다. 우리가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한 독일인 수녀를 만났다. 인사를 하니 자기는 6개월 전에 독일에서 온 텔레사 수녀원 소속 수녀라고 한다. 이곳 Aids 수용소에서 자원 봉사하고 있다고 한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니 밝은 웃음을 얼굴에 담고 조용히 웃고만 있다. 그 수녀의 안내를 받아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니 수용소는 3개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입구 쪽은 남자 병동이 있었다. 오후가 되었는데도 많은 환자들이 아직도 접시를 들고 점심 배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 배식을 받을 수 있는 환자들은 비교적 경(經)한 Aids 환자들이고, 중(重)한 환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어 있었다. 병실에 들어가 보니 이곳은 병실이 아니고 녋은 방에 침대를 빼곡이 채워 놓은 환자들의 합숙소였다. 이곳에는 남자 환자 1000여 명, 옆 병동에는 여자 환자 1000여 명, 그리고 아래 병동에는 어린 아기 환자 500여 명이 합숙하고 있다고 한다. 2500여 명의 Aids 환자들의 거대한 수용소였다. 이렇게 많은 소망 멊이 죽음의 날만 기다리고 누어있는 Aids환자들을 바라보니 머리가 멍멍해 진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엇이라고 기도해야 할지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잠시 눈을 감고 묵상하고 있는데, 선교사가 나를 보고 김 목사님 저 소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죠. 저 소녀는 예수님을 영접한 환자입니다하고 나를 쳐다본다. 앞에 놓여진 허름한 침대에 누어있는 여성 환자는 20여세쯤 되어 보이는 젊은 환자였다. 누어있는 젊은 환자를 쳐다보니 몹시 여위었으나 아름답고 깨끗한 얼굴 모습이 조금 전에 우리를 안내하던 독일인 수녀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런데 한 사람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수녀로, 한 사람은 소망 없이 죽어가는 Aids 환자로 허름한 침대에서 죽어 가고 있다니 가슴이 답답하다. 선교사와 나는 Aids 환자의 뼈만 남은 가냘픈 소녀의 손을 함께 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이 소녀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이 소녀는 세상에서 주님을 알지 못하여 범죄하여 그 죄값으로 이제 죽어가고 있으나 이 소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주님을 만나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 들였아오니 이 딸은 하나님의 딸 인줄 믿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옵소서. 기도를 마치니 그 소녀의 눈에 눈물이 보인다. 우리는 기도를 마치고 말없이 그 병동을 나왔다. 그리고 어린 아기 병동으로 갔다. 그 곳에는 아기를 담은 큰 상자(Playpan)들이 방 가득히 진열되어 있다, 아기 울음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린 아기들이 거의 앞을 못 보는 시각 장애인 들이었다. 알아보니 Aids 환자가 임신을 하게되면 아기는 거의 시각 장애인으로 출생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죄 없는 아기가 부모 때문에 날때부터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맑고 깨끗한 천사 같은 어린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날 때부터 Aids 환자가 되어 소경으로 태어나다니, 인간의 죄악의 무서움과 죄의 결과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부모의 죄악때문에 죄 없는 어린 아기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나는 앞에 있는 큰 상자 속에서 밝게 웃고 있는 소경으로 태어난 아기의 손을 잡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아기들이 이곳에 5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나는 아디스 아바바 Aids 수용소를 나오면서 생각해 보았다. 2500 명이 넘는 많은 Aids 환자들이 함께 죽음의 날만 기다리며 고통 중에 죽어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어떤 사람은 도중에 Aids가 걸려 이 수용소에 들어와 죽어가고 있다. 그 고통 중에서도 식사 시간에는 먹고 살려고 가벼운 환자들은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일어날 수 없는 환자들은 침대에서 음식을 기다리고들 있다. 죽는 날 까지는 먹고 마셔야 한다. 아무 소망도 없이 저주 받은 삶을 위해 먹고 마시는 환자들을 본다. 이곳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환자가 있고,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환자가 있다. 이 Aids 수용소는 바로 작은 지구촌과 같다고 생각이 든다. 지구는 거대한 죽음의 수용소다. 75억의 온 인류는 지금 죄의 삯으로 죽어 가고 있다(롬6:23).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은(엡2:8) 주님 안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에티오피아 선교방문기 (3)

오늘은 6.25. 참전용사 사무실을 방문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6.25 한국동란에 참전한 우방 국가이고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반공국가이다. 참전용사 사무실은 좁고 환경은 열악하였으나 우리 일행을 맞는 노병들의 마음은 뜨겁고 부드러웠다. 짧은 한국어로 인사를 한다. 저들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뜨거운 우정을 느낀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이 가슴에 벅차오른다. 저들은 6.25 동란에 참전 한 것을 크게 자랑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Hailee Selassie 황제 때인 1950-1953년까지 모두 6037명이 참전했고, 121명이 전사했으며, 536명이 부상했고 포로는 1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후 에티오피아가 1974-1991년까지 17년간 공산치하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황제가 살해 되었다고 한다. 참전 용사들의 흰 머리와 주름 덮인 검은 얼굴을 보며 한국동란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저들을 위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사무실을 나온 우리는 한 참전용사의 가정을 방문 했다. 정부의 연금으로 살고 있다고 하는데 집안은 몹시 누추했다. 벽에 많은 사진들이 붙어있다. 군복을 입고 있는 젊은 사병의 사진은 한국전쟁에서 찍은 자기 사진이라고 하며 몹시 자랑을 한다. 나는 그 빛 바랜 낡은 사진과 한국동란에 참전한 것을 자랑하며 한국을 친근하게 느끼며 사는 노병을 보며 비록 한국과 에티오피아는 거리는 멀어도 두 나라는 가까운 이웃 우방국가라는 것을 새롭게 느꼈다.

오후에는 남쪽 지방 수단 접경지역인 Hamer Banar부족을 방문하기로 했다. 선교사는 캠핑을 가는 듯 많은 준비를 한다. 음식물, 비상식량, 스리핑 빽, 램프, 두꺼운 옷과 담요등 우리 일행의 비상 용품을 준비한다. 나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원주민 선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 후에 집을 나섰다. 

Addis Ababa 시내를 벗어나 시골로 들어서니 아프리카의 냄새가 싱그럽다. 아프리카를 자주 방문하지 않은 사람은 이 냄새를 못 느낀다. 차 창문을 여니 아프리카의 열기와 함께 열대지방에서만 자라는 숲과 대지의 냄새, 아프리카 시골 주택에서 풍기는 냄새,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흙 먼지 냄새, 도로 옆을 떼 지어가는 소떼, 양떼, 염소떼들의 냄새, 한가하게 마차를 타고 가는 원주민들의 냄새, 가끔 흙먼지를 풍기며 달리는 대형 트럭의 기름냄새, 대지를 태울 듯이 강하게 내려 쪼이는 태양의 열기 냄새, 이러한 냄새들이 혼합하여 풍기는 독특한 냄새를 나는 아프리카의 냄새라고 한다. 

도로주변 상점 앞에 수 십개의 통들이 빨래 줄에 매어 달려있다. 나는 의아해서 선교사에게 물었다. 이 통들은 물을 담아서 파는 통들이라고 한다. 시골에 들어가면 물이 귀해서 장거리 여행을 갈 때에는 물을 사가야 한다고 한다. 어느덧 마을을 지나 산길로 들어섰다. 길은 점점 험해지고 좀처럼 마을이 나오지 않는다. 어느덧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운전을 하고 있는 선교사가 조금 불안한 음성으로 속히 마을이 나와야 하는데 하고 말을 흐린다, 나와 아내는 조용히 눈을 감고 무사히 다음 마을까지 갈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숲이 깊은 산 모퉁이 길을 돌아서니 멀리 마을 불빛이 반짝인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고 다시 기도를 드리려고 하는데 차가 갑자기 선다. 눈을 떠보니 우리가 타고 가는 차 앞에 큰 돌들과 장대가 길을 막고 있다. 여러 명의 원주민 청년들이 차 앞으로 몰려온다. 선교사가 차에서 내려 현지 언어로 한참 싱갱이를 한다. 나와 아내는 차 안에서 열심히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다 무사히 통과 하게 해 달라고, 조금 후에 원주민 청년들이 길을 막고 있던 돌들과 장대를 치운다. 그리고 선교사가 웃으면서 차로 돌아왔다. 선교사가 되어진 상황을 설명한다. 우리는 Hamer Banar 지역으로 선교를 하러가는 선교팀이라고 설명하니, 마침 원주민 청년들 중에 예수를 믿고 있는 청년이 있어서 무사히 통과 되었다고 한다. 저들은 날이 어두어지면 큰 돌과 장대로 길을 막고 있다가 지나가는 차량을 멈추고 돈을 빼앗는 무리들이라고 한다. 선교사가 다시 불안해하며 저 불빛이 있는 마을까지 무사히 가야 한다고 말한다. 나와 아내는 뒷 자리에서 다시 간절히 기도드렸다. 불빛은 가깝게 보였지만 거리는 굉장히 먼 것같이 느껴졌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무사히 마을에 도착 할 수가 있었다. 이 마을은 작지 않은 도시였다. 

우리는 시내로 들어가며 우리가 투숙할 숙소를 찾아보았다. 선교사가 먼저 숙소를 찾았다고 소리를 지른다. Hotel이라는 작은 간판이 보인다. 선교사가 Hotel 마당에 차를 세운다. 벌서 밤이 깊었다. 차에서 내려오니 많은 트럭들이 넓은 마당 이곳 저곳에 정차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투숙할 호텔 건물이 안 보인다. 선교사에게 물으니 차를 세운 앞에 있는 움막(?) 같은 곳이 숙소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송판으로 만든 문이 보인다. 문을 여니 바로 방이다. 방안에서는 구리스(Grease) 기름 냄새가 진동한다. 벌러지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방안에는 40촉 정도의 흐린 전등이 하나 켜저있고 작은 이인용 침대 하나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져온 가방 한 개도 놓을 공간이 없다. 호텔이라고 하는 방에는 변소, 세면소, 샤워장은 물론 창문도 없는 구리스 냄새가 진동하는 오직 작은 침대 하나만 있는 감옥(?) 같은 방이다. 우리 부부는 먼저 침대위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꿁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샤워는 물론 세수, 양추질도 하지 못하고 피곤한 몸을 쉬려고 침대 카바를 들어내니 침대 속에서 이상한 냄새가 진동한다. 방의 구리스 냄새와 침대 속의 이상한 냄새가 합하여 우리들의 코를 자극한다. 침대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는다. 나와 아내는 기가 막혀서 서로보고 웃었다. 이곳은 아프리카 시골이다. 편히 쉴 수 있는 호텔(?)을 찾은 것 만으로 감사하자 하고 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었다. 그러나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옆에 누운 아내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거의 밤을 새우다 시피하고 새벽에 일어나 밖에 나가 보니 트럭들이 앞 마당에 가득하다. 알아보니 이곳은 장거리 트럭 운전사들이 밤에 잠시 눈을 붙이고 떠나는 Hotel 이라고 한다. 화장실을 찾으니 건물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면장도, 샤워장도 없고 멀리 숲속에 재래식 변소가 하나 있을 뿐이다. 선교사와 우리부부는 일찍이 일어나 함께 찬송을 부르며 아침 기도회를 가졌다. 아프리카의 아침 공기는 유난히 맑고 신선했다. 우리들의 마음도 몸도 신선하고 즐거웠다. 아프리카에서의 새로운 날이 다시 시작되었다. 주님, 오늘 하루의 삶을 선히 인도하소서. 이 Hotel의 숙박료를 물으니 하루에 $1.20라고 한다.

 에티오피아 선교방문기 (4)

선교사와 우리 부부는 다시 Hamer Banar 부족이 살고 있는 에티오피아 남쪽 수단 접경지역으로 차를 몰았다. 도로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차가 몹시 흔들린다. 선교사가 우리가 염려 되는지 뒤를 돌아 보며 위로의 말을 한다. 차가 몹시 흔들리어 뒷자리가 힘들지요? 이곳에 오려면 항상 힘든 일정을 각오해야 합니다. 특히 차량 바퀴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과거에도 차량 문제로 여러번 힘든 경우를 격었습니다고 한다. 저녁 무렵에 안식년을 떠난 독일 선교사가 살던 숙소에 도착했다. 비록 낡고 허룸한 숙소지만 현지인들이 사는 집이나 어제 밤에 자고 온 호텔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집이다. 더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니 몸이 날아 갈 것만 같다, 샤워한지가 퍽 오래된 것 같다. 나무로 만든 허룸한 침대에서 단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선교사와 우리 부부는 함께 아침 기도회를 갖은 후 준비해 온 자료로 아내가 지어준 아침 식사를 하니 아프리카로 캠핑을 온 것 같다. 아프리카의 오염되지 않은 맑고 신선한 공기,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넓게 펼처진 아프리카의 대 자연 그리고 아프리카의 냄새, 모든 것이 신비하고 아름답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마음껏 심호흡을 했다. 뱃속 깊은 곳으로 신선한 공기와 아프리카 정기가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다시 차를 타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한쪽 타이어에 문제가 생겼다. 선교사와 나는 힘을 모아 보조 타이어로 바꾸었다. 가까운 곳에 차량 정비소가 없어서 선교사와 나는 힘을 합하여 손 연장을 사용하여 바퀴를 바꾸었다. 그리고 비포장도로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거의 12시가 되어 콘소 부족의 중심지인 콘소에 도착하였다. 콘소(Konso)부족은 약 이 십만 명이 되며 얼마 전에 부친 추장이 죽고 현재는 그 아들이 추장이 되어 부족의 왕(King)의 직무를 맡았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왕은 얼마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선교사는 Konso 부족을 잘 알고 있었다. 먼저 Konso Mekane Yesus Lutheran Church를 방문했다. 우리는 그 교회에서 기도를 마친 후에 그 교회의 전도사를 따라 NRU (Nutrition & Rehabilitation Unit)와 TFC(Therapeutic Feeding Center) 를 방문했다. 이곳은 미국과 1년간의 계약으로 운영되었으나 계약기간이 꿑나 지금은 NRU와 TFC가 문을 닫았으나 혹시나 해서 아직도 뜰에 많은 빈민들이 모여 있다. 굶주린 아기와 엄마를 보니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다. 나는 한 아기를 안고 그 아기 어머니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많은 부모들이 서로 기도해 달라고 모여온다. 이곳은 4,5,6월이 우기인데 비가 오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기아 상태에 있다고 한다. 가뭄 때문에 누렇게 말라 버린 옥수수를 땔감으로 쓴다고 옥수수 잎울 둥에 지고 가는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오는데 길에서 소년들이 우리 차를 따라오며 소리를 지른다. 차를 정차하고 창문을 여니 소년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른다. 자동차 바퀴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내려가서 타이어를 점검해 보니 네 바퀴가 모두 빠질 것 같았다. 비포장 산길을 무리하게 장시간 운전을 한 관계로 바퀴를 고정시키고 있는 나사(Bolt) 구멍이 늘어나 바퀴가 당장 빠질 것만 같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수단 접경 Hamer Banar 까지 가는 계획을 포기하고 

Konso 부족 추장 집으로 가기로 했다. 

현재 Konso 부족의 왕은 얼마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기독교 신자로 선교사와 잘 아는 사이였다. 선교사는 나와 아내를 추장 집에 나려 놓고 자동차 정비소를 찾아서 떠났다. Konso 부족의 왕은 이 지역에 있는 부족을 통솔한다. 평민은 10명까지 부인이 허용되지만 왕은 1명의 부인만 허용된다그리고 왕의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왕과 왕비는 다른 방을 써야하며 절대로 합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왕가의 삼촌과 어린 조카 사이의 비극을 미리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한 왕은 음식도 가려 먹어야 한다. 부인이나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만 먹어야하며 물도 정수물만 마셔야하고, 외출 중에는 반드시 아내나 어머니가 싸준 분말 곡식을 가지고 가야 한다. 식당에서는 물론 다른 사람이 가져 온 음식은 절대로 입에 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미국에서 가져간 한국 라면과 초코렛과 과자등 여러 가지 음식을 내놓았으나 왕의 가족들은 먹었지만 왕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또한 이 부족의 왕은 조금도 왕의 티를 내지 않았다. 다른 나라 왕들과 같이 왕의 권위를 지키거나 섬김을 받는 왕이 아니라 가족을 섬기며, 부족을 섬기는 왕의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왕의 가정에는 식모나 하인이나 경비하는 사람도 없다. 왕이 직접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마당도 쓸며, 부인을 도와서 여러 가지 일을 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가정과 부족을 섬기는 왕, 검소하고 소탈하며 겸손한 왕,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아들이 결혼을 하면 부부간에 합방을 금하는 왕, 아무리 먹고 싶어도 부족을 돌보고 섬기는 왕은 건강해야 하므로 정해진 음식 이외에는 다른 음식을 먹지 않는 왕, 그리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배우려는 겸손한 왕의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이며 종으로 살면서 과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생각해 보았다. 과연 나는 가족을 섬기며, 성도를 섬기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2:5)으로 섬김의 삶(마20:28)을 살고 있는지, 과연 하나님의 성전인 나의 몸(고전3:16)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모든 것에 절제하며 살고 있는지, 과연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일개 부족의 왕노릇을 하기 위해서도 이렇게 자신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며 절제와 금욕생활을 하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고전10:31) 나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나 생각하니 부끄럽기만 하다. 나와 아내는 왕과의 대화를 마치고 마당 모퉁이에 있는 통나무 의자에 앉아 조용히 반성하며 기도를 드렸다. 콘소 부족의 왕이며 추장은 40여세 된 Kala Gejaing 왕이었다. 왕은 부인과 아들 하나가 있었다.

 에티오피아 선교방문기 (5)

어느덧 밤이 깊었다. 자동차의 바퀴 림(rim)을 고치러간 박 선교사는 밤이 되도록 오지 않았다. 우리 일행의 간이 식량과 식사자료는 모두 차량에 있었기 때문에 아내와 나는 저녁을 굶었다. 왕과 부인은 우리가 불쌍한지 옥수수와 콩을 섞어서 볶은 것을 그릇에 담아 조금 가져 왔다. 우리 부부는 너무나 고맙고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허겁지겁 먹었다.

이곳은 전기도 수도도 없는 곳이고, 주택은 아프리카 원주민의 짚으로 만든 전통적 둥근 움막이며 방문한 손님은 흙바닥에 깔아 놓은 멍석에서 주인을 만난다. 따라서 나와 아내는 이 멍석에 앉아 기다렸다. 거의 밤 10시가 되어서 박선교사가 돌아왔다, 왕이 머무는 속소의 등잔 불도 이미 꺼졌다. 배가 고팠지만 우리는 그냥 잘 수 밖에 없었다. 슬맆핑 빽을 멍석 위에 폈다. 슬리핑 빽으로 들어가서 하늘을 처다 보니 아프리카의 밤 하늘의 별들이 당장 얼굴로 쏟아 질 것만 같다. 나의 왼 편에 누워있는 아내의 스립핑 빽에서 기도 소리가 조용히 들려온다. 오른 편에 누어있는 선교사는 몹시 피곤한지 벌써 코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기도 소리와 코고는 소리를 함께 들으며 하늘의 별들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프리카 대륙, 에티오피아 남쪽 산골 오지, 어느 추장 집, 흙바닥 위에 깔려진 멍석 위의 슬립핑 빽 속에 누어 별을 보며 묵상하는 나. 기도하는 아내와 선교사역을 감당하느라고 하루 종일 먹지도 못하고 애쓰다 지쳐 피곤하여 코골며 자는 선교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주님께서 맡겨주신 각 자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두렵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게 살아야 하는데(창1:31) 잠이 오지를 않는다. 나는 다시 조용히 일어나 앉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에서 알 수 없는 벌러지들의 합창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은 주일 아침이다. 어제 밤에는 흙바닥, 멍석, 슬립핑 빽 속에서 하늘과 별을 보며 잠을 잤지만 몸은 몹시 개운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아내와 함께 대문 밖으로 나가 보니 맑은 시냇물이 집 옆으로 흐른다. 어제 밤에 보지 못한 아름다운 광경이다. 뿌옇게 밝아 오는 아프리카의 새벽, 맑은 공기, 시냇 물소리, 이름 모를 아프리카의 풀들과 꽃들, 아침 새 소리, 이 아름다운 냇가에 서서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한참 찬송을 부른 후 함께 기도를 드렸다그리고 냇가로 가서 세면을 하니 미국에서 맛 불 수 없었던 아프리카의 새벽의 맛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나와 아내는 피곤한 것도 잊고 새벽 동산을 함께 산책하며 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다.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동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뒷 뜰에 마련된 임시 부엌(?)에서 라면과 간단한 음식을 만들었다. 왕의 가족들을 모두 초청해서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그러나 왕은 보기만 하고 아무 음식도 입에 대지를 않는다. Konso 부족의 왕은 부인이 만들어 준 음식만 먹는다. 왕이 먹고 있는 음식은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 매일 먹는 안전한 음식이었다. 혹시 다른 음식을 먹고 왕이 병들면 부족을 지키고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부족의 전통과 왕의 삶은 나에게 큰 교훈을 남겨주었다. 우리는 아침 식사 후에 뒷 뜰에서 왕의 온 가족과 함께 가정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들은 모두 영어를 알아들었다. 선교사가 사회를 보고 아내는 기도를 하고 나는 말씀을 전했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을 전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과 죄 사함과 구원, 그리고 영생에 대한 말씀을 쉬운 말로 전했다. 왕의 온 가족과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었다. 예배 후에 갑자기 왕의 가족과 친밀 해진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왕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돌아가신 부친 왕이 살아 계실 때에는 자신은 신학교에 등록을 하고 졸업 후에 목사가 되어 온 부족에게 예수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 왕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제는 신학교에 갈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왕은 부족을 떠나서 생활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겸손하고 순수하며 진실된 왕을 보며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생활을 하였다. 알지 못했던 세계, 처음 보고 들은 문화와 전통, 새로운 사람들, 세상에 때묻지 않은 겸손한 사람들, 맡은 바 책임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 절제하며 사는 왕의 삶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는 왕의 가족과 헤어짐의 아쉬운 마음을 남겨 놓고, 현지인 교회로 주일 예배를 드리러 떠났다. 왕의 두 동생도 함께 예배에 참석하겠다고 우리를 따라 나선다. 이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처음 교회에간다고 한다. 현지인 교회는 산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 중턱까지는 차가 올라 갈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은 계단과 험한 돌 길을 한참 올라가야 교회에 이를 수 있었다. 교회는 벽은 수수깡으로 둘러쳐저 있고 지붕은 양철 슬레이트로 덮여진 원주민 시골 교회였다. 찬양 소리가 밖에까지 들러온다. 안으로 들어서니 교회 안에 성도들이 가득찼다. 교회에 의자는 없고 흙바닥에 멍석을 깔아 놓은 예배당이다. 멍석 위에 서로 다른 성가대 까운을 입은 4개의 성가대원들이 앞자리에 가득했다. 뒷자리의 성도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멍석 바닦에 모인 성도가 800명이 넘는다. 약 2시간 가량 찬양을 계속 부르고. 찬양 인도자가 성경을 봉톡한 다음 4개의 성가대가 순차적으로 찬양을 드린다. 박선교사가 나를 소개하고 나는 먼저 하모니카로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364장)을 부르고 말씀을 전했다. 감격의 시간이었다. 콘소 부족 800여명의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사회자가 앞에 나와 헌금 시간에 바친 많은 달걀, 옥수수, 감자, 곡물, 닭등 여러가지 물품들을 경매(?)한다. 교회 안이 조금 소요스러워 진다. 성도가 바친 물품들을 현장에서 경매(?)하여 수입된 돈을 다시 교회에 바친다고 한다. 나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예배 후에 성도들에게 준비해 온 Candy, Tshirt, ball pen, 약품등을 나누어 주었다.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선교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선교는 단순히 말씀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바꾸어야 하므로 말씀과 기도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딤전4:5) 선교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여야 하며, 선교는 선교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선교사의 기도와 말씀으로 이루어짐을 알게 된다

에티오피아 선교방문기 (6)

해외 선교지에 기도세미나를 인도하러 갈 때에 여러 번 체험한 일이지만 이번 에티오피아 기도세미나를 인도하러 갈 때에는 더욱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며 동행하신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내는 나의 선교지 기도세미나에 늘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고 있지만 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힘든 선교지에 갈 때에 휴가를 얻어 나와 동행하며 곁에서 기도한다. 이번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선교지는 힘든 지역이기 때문에 나와 동행하기로 했다. Los Angeles에서 에티오피아 Addis Ababa 까지는 먼저 영국 London/ Heathrow 공항까지 가서, 그곳에서 다시 Egypt Alexandria를 거쳐서 에티오피아 Addis Ababa 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나는 선교지 여러 나라에 비행기를 타고 다녀야 하므로 장거리 비행을 할 때에 몇 가지 요령을 알고 있다.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 위를 허리띠로 꼭 매고 있으면 다리가 아프지도 않고 피곤도 훨씬 적다. 또한 비행기 내에서 앉아서 하는 운동법도 몇 가지 알고 있다. 특히 기내에서 성경을 통독하거나 성경기도백과(보이스사)를 읽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장시간 비행기를 타도 나는 별로 힘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아내는 일 년에 두세 번 선교지에 가기 때문에 장거리 비행기 여행을 몹시 힘들어 한다. Economy Class의 좁은 공간, 만원 승객, 특히 밤을 새워 비행 할 때와 화장실에 다닐 때에는 더욱 힘들다. 그러나 모든 일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기쁨으로 기도세미나를 인도하러 다니고 있다. 

이번 에티오피아 아디스 아바바로 가는 일정은 오후 5:35에 LAX를 떠나 다음날 정오12시에 영국 London/Hearthrow에 도착 하는 British Airway이다. 출발 바로 전 날 저녁에 갑자기 타주에서 잘 아는 집시님 한 분에게서 장거리 전화가 왔다. “내일 아프리카로 선교여행을 떠나신다면서요?“ 하며 조금 흥분된 음성이 들려온다. 이어서 ”그런데 왜 연락도 않하시고 떠나시려고 합니까?“

제가 조금 선교비를 Western Union으로 보냈습니다. 작지만 선교비에 보태 쓰십시오 하고 전화를 끊는다. 나는 미쳐 감사하단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전화기를 내려 놓고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드린 후, 선교 헌금을 보내 주신 집사님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이번에는 선교비가 약 $2000.00 정도 모자라서 잠시 걱정을 했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의 사정을 아시고 먼 곳에 계신 집사님을 통하여 선교비를 보내 주신 것이다.

오늘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로 떠나는 날이다. 일찍이 일어나 아내와 함께 기도를 하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9시가 되어 Western Union으로 갔다. 생각지도 않았던 현금 $2000.00이 송금되었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집사님을 통하여 보내주신 선교 헌금임을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여행 가방에 잘 보관했다. 그리고 다시 감사 기도했다. 그때에 내가 섬기고 있는 본교회 성도님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 이 문제는 목사가 성도댁에 가서 해결해 드려야 할 급한 문제였다. 

나와 아내는 오후 5:35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하므로 늦어도 오후3:30까지는 LAX 공항에 도착해야 하는데 성도님 댁에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 드리고 다시 집에 와서 아내와 함께 오후3:30까지 LAX 공항까지 간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선교도 중요하지만 내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님의 문제는 더욱 중요하므로 즉시 성도님 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 드리고 아내와 함께 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오후4:30이 지났다. 출발시간이 1시간도 남지 않았다. 급히 Britjsh Airway로 가니 우리 Ticket은 이미 대기자에게 팔렸다고 하며. 내일 다시 오라고 한다. 우리 부부는 잠시 기도한 후에 옆에 있는 British Airway 제복을 입은 사람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 했다. 늦게 온 것은 우리의 잘못이지만, 우리는 London/ Heathrow를 거쳐서 Addis Ababa 까지 가야하며, 새벽 1:40에 선교사가 마중을 나온다고 사정을 이야기 했다. 제복을 입은 직원은 우리의 얼굴과 Ticket을 보더니 잠시 기다리가고 하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우리 부부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로 매어달릴 수 밖에 없었다. 한참 기도를 하고 눈을 뜨니 출발 시간이 30분 밖에 남지 않았다. 이때에 제복 입은 직원이 얼굴에 웃음을 띄고 나와서 속히 들어가라고 한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검문대를 거쳐서 출발 Gate에 도착하니 출발 5분 전이었다. 아내는 나보다 앞서서 스튜어디스도 제치고 좌석 번호를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스튜어디스가 나의 좌석표를 보더니 입구에 서있으라고 하고 아내를 따라 안으로 뛰어 간다 그리고 아내를 다리고 다시 입구로 나온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고 있는데 우리 좌석은 1층 Economy Class 가 아니고, 2층 1등석이라고 한다.

Economy Class 요금으로 난생 처음 British Airway 1등석에서 아내와 함께 LAX에서 London/ Hearthrow 까지 편안히 선교여행을 갈 수 있었다. 동시에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다. 부족했던 선교비 $2000.00 문제 해결, 장거리 비행기 여행의 협소한 Economy Class 문제 해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하신 말씀이 머리에 떠오른다. 우리 부부는 감사기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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