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전문월간지 62호 2007년 6월 1일 발행

  월간  기   도
                 Monthly  Prayer Journal
                          주여, 나로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 나의 눈과 귀와 입이 -------------------- 김정복 -- 1(OK) 2
        * 하나님은 사랑이라 ------------------- 사도 요한-- 1 (OK) 3 

` * 땅에 엎드려 기도하라 ——————-김정복 — 2 (OK) 5
* 구약에 나타난 기도 (53) —————-김시남 — 2 (OK) 7
* 시편정해 (62) ————————최선호– 3 (OK) 10
* 기도칼럼 (9) ——— 모세의 도고 ——김정복 == 1 (OK) 11
* 목양칼럼 (21) ——-위기는 기회다——차현회 — 1 (OK) 12
*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 정기환 — 1 (OK) 13
* 미국교회의 역사 (17) ——————이정남 — 2 (OK) 15
* 근본 문제는 영적문제이다 ————– 옥세철 — 2 (OK) 17
* 선교칼럼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 이재환 — 1 (OK) 18
*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온 편지 ———- 하상기 — 1 (OK) 19
* 남미 파라과이에서 온 편지 ————–정금태 — 1 (OK) 20
* 성경적 기도와 Q.T.세미나 안내 ——– 기도학교 — 2 (OK) 22
* 국제 WMC기도학교 안내 ————–기도학교 — 1 (OK) 23
* 뒷장 ————————————- 1 (OK) 24
* 첫 페이지 (사진) —————————– 1 () 1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눈과 귀와 입이
김정복 목사 (발행인)
나의 눈은 하나님만 향하게 하소서
나의 귀는 하나님의 음성만 듣게 하소서
나의 입은 하나님의 진리만 전하게 하소서
오주여, 나의 눈과 귀와 입이
온전히 당신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나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만 읽게 하시고
나의 귀는 하나님의 진리만 듣게 하시고
나의 입은 하나님의 복음만 전하게 하소서
오주여, 나의 눈과 귀와 입이
온전히 당신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나의 눈은 참 빛(요1:9)을 향하게 하시고
나의 귀는 진리의 음성을 향하게 하시고
나의 입은 생명의 말씀을 증거케 하소서
오주여, 나의 눈과 귀와 입이
온전히 당신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나의 눈은 당신의 역사를 보게 하시고
나의 귀는 당신의 복음을 듣게 하시고
나의 입은 당신의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오주여, 나의 눈과 귀와 입이
온전히 당신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나의 눈은 세상의 죄악을 보지 않게 하시고
나의 귀는 세상의 죄악을 듣지 않게 하시고
나의 입은 세상의 죄악을 말하지 않게 하소서
오주여, 나의 눈과 귀와 입이
온전한 당신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성경에 나오는 시
요1서 4:7-12
하나님은 사랑이라
사도 요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땅에 엎드려 기도하라
                                                  김정복 목사(킬빈성서신학(원) 기도학 교수)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리어 경배하며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시옵소서 이는 목이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하며(출34:8-9) 모세가 땅에 엎드려 기도한 내용이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먹고마시소서 큰비의소리가 있나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 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수있고(왕상18:41-42), 에스라가 하나님전(殿)앞에 엎드려울며 기도하여 죄를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남녀와 어린아이의 큰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하는 학사 에스라가 땅에 엎드려 통회자복하며 개혁운동을 일으키는 모습을 볼수 있으며(스10:1),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아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 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이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이 있다. (욥1:20-21)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데리고가실 새 심히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간구한 모습을 볼 수 있다.(막14:33-35)
이와 같이 모세, 엘리야, 에스라, 욥 그리고 예수님이기도하실 때에 땅에 엎드려 하나님앞에 기도하셨다. 이제 땅에 엎드려 기도한 그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로 하나님의임재(臨在)앞에 두렵고떨림으로, 하나님을경외하는마음으로 땅에 엎드린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매 급(急)히 땅에엎드려 경배하고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하며 땅에 엎드려 기도하였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엘리야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삼상18:1)을 이루실 것을 믿고 땅에 엎드려기도하며 하나님의약속을 기다린것이다.
엘리야는 먼저 이스라엘왕 아합 앞에서 바알선지자450명과아세라선지자 400명과 대결하여 엘리야를통하여역사하시는 하나님이참하나님이심을증거하고, 바알선지자450명과 아세라선지자 40명을 기손시냇가에서 다죽인후에 이어서하나님께서약속하신비(왕상18:1)를 땅에 엎드려 기도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본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고 우리는 땅에엎드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려야 한다.
셋째로 에스라는 신앙개혁을일으킬때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하고 기도한 것이다. 또한 에스라가하나님앞에울며회개하며 신앙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에스라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바모세의율법에익숙한학사로서 그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것은다받은자니라(에7:6)하신말씀에있다.참회개운동과 참신앙운동은 에스라와 같이 하나님말씀에 익숙한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넷째로욥은사탄의시험(욥1:11-12)으로 갑자기자녀10명과 온재산을잃고 가정의큰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겉옷을찢고 머리털을밀고 땅에엎드려 하나님을경배하며기도하였다. 욥은 이 모든일에도범죄하지아니하고 하나님을향하여어리석게원망하지아니하였다(욥1:22).
다섯째로 예수께서 십자가를지시기 전날밤 겟세마네동산에서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의뜻을이루시기위하여 기도하실 때에 땅에 엎드려간절히기도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땅에엎드려밤을새워 간절히 기도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바른 기도의 삶과 온 밤을 새워 기도하심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의 삶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우리도 어려운 일이 임했을 때에 온 밤을 새워 땅에 엎드려 기도하여야 하며, 기도 할 때에 우리의 몸만 땅에 엎드려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땅에 엎드려지도록 두려움과 떨림과 겸손함과겸비함으로 하나님께기도하여야한다.

구약에 나타난 기도 (53)
(한나의 기도, 사무엘상1:9-18)
김시남 목사 (국제신학대학(원) I.T.S.교수)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기도 가운데 좋은 기도와 나쁜 기도 또는 응답되는 기도와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있을 수 있을까? 만약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기도들을 드린다면 어떠한 기도가 좋은 기도이며 어떠한 기도가 응답되는 기도일까?
지난 4월 28일자 LA 타임즈에 의하면 미국에 거주하는 라틴계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8%를 제외한 나머지는 여러 종류의 기독교 교파에 속한 것으로 보도되었으며 열 사람 중에서 일곱 사람은 매일 기도한다고 보도되었다. 또한 이 동일한 보도에 의하면 복음주의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87%가 매일 기도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기도를 하는 현상은 라틴계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한인 기독교인이나 미국 기독교인들에게도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기도가 이와 같이 흔히 행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어떠한 기독교인들은 이 글의 처음에 제시된 것과 같은 질문을 할런지도 모른다. 즉,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는 하지만 바르게 기도하는 사람과 바르지 않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만약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잘못된 기도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드리는 기도가 바른 기도라고 정의한다면 나 자신이 드리는 많은 기도들이 잘못된 기도인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 기도의 배후에는 나 중심적인 동기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내 소견에는 구원과 마찬가지로 기도의 응답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된다.
나는 과거에 한나의 기도를 본지에서 다룬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호에서 다시 한나의 기도를 살펴보려고 하는 이유는 그 때에 살펴보지 못한 점을 제시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응답되는 기도가 가져오는 한 현상에 대하여 생가해 보기 위함이다.
한나의 기도의 골자는 만약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그녀에게 아들을 주신다면 그 아들을 그의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바치겠다는 서원이었다. 한나의 이야기를 통하여 발견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예배 속에 나타나는 제사장의 역할이다. 제사장 엘리가 한나의 기도하는 태도를 책망한 것을 볼 때 당시 제사장들이 예배드리는 자들과 예배 전체를 감독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한나의 해명을 듣고 엘리 제사장이 축복하는 장면은 제사장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예배자들에게 기도의 응답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나가 엘리 제사장이 그녀를 오해한 것을 해명할 때에 엘리는 다음과 같이 한나에게 축복한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제사장의 축복을 들은 한나의 태도에 대하여 성경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녀가)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이 묘사는 기도 전의 한나와 기도 후의 한나가 전혀 다르게 변하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한나의 이야기의 초반에는 불임의 문제 때문에 그녀가 “번민”하였으며 때로는 울며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 (엘가나)이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라고 말하며 위로하곤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서원의 기도를 드리고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의 축복을 들은 후에 한나는 수색이 없는 여자로 변하였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그녀가 엘리의 축복을 믿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한나는 결국 임시하게 되며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사무엘을 출생하게 된다.
한나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발견하는 것 중에 하나는 기도 후에 기도자에게 발생되는 특이한 현상이다. 한나의 이야기 속에서 그녀가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기도를 과거에 몇 번이나 드렸는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이 본문에 나타나는 한나의 기도가 아들을 얻기 위한 그녀의 최초의 기도라고 보기는 극히 힘들다 왜냐하면 엘가나의 가족이 해마다 하나님의 집에 예배드리기 위하여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나의 과거의 기도와 이번의 기도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도드린 후에 나타난 한나의 태도임이 분명하다. 이 번 기도 후에 한나의 얼굴에는 다시 수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엘리의 기도 응답의 축복을 그녀가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나와 엘리 제사장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가 깨닫는 것은 우리에게도 기도응답의 축복을 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16:23-24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것을 다음과 같이 약속하신다: “ . .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한나의 기도시대와 우리의 기도시대를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싶다.
한나의 기도 엘리의 기도응답의 축복 기도의 응답
우리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응답의 약속 기도의 응답
이 비교를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잘못은 한나가 인간 제사장인 엘리의 축복을 믿고 수색을 보이지 않은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응답의 약속을 알면서도 기도 후에 여전히 걱정과 두려움 속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판단으로는 어떠한 기도가 좋은 기도이며 어떠한 기도가 나쁜 기도인가를 구별하기 힘들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좋은 기도는 기도의 내용에 있지 않고 기도 후에 나타나는 결과에 있다는 점이다. 좋은 기도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마음속에서 제거하며 평안과 기쁨을 가져오는 기도이며 결국에는 응답을 얻는 기도이다. 이러한 응답은 인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시고 계심을 믿음으로서 가능하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라고 기도를 끝낼 때 마다 누가 우리의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고 계신가하는 것을 기억하자.

시편정해 (62)
시편 50편
최선호목사(메시야교회 담임, 시편정해저자)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신실하지 못함에 대하여, 이를 경고하며 백성을 교훈하고 부도덕함을 시정하여 예배는 참되게 드려야함을 가르쳐서, 감사의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알리고 있다.
주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소재: 제사의식과 윤리문제.
배경: 예배.
수사: 영탄, 상징, 열거, 인용, 활유.
경향: 경고, 지혜, 교훈적.
구성: 4단. 기(1~6절), 승(7~15절), 전(16~21절), 결(22~23절).
작자: 아삽(A psalm of Asaph). 이 시의 지은이가 표제에 있는 대로 아삽인지, 다윗이 지어서 성전 예배 때에 부르도록 그에게 맡겼는지 분명하지 않다. 대하29:30에는 베레가의 아들이며, 또 자기의 아들들과 함께 예배시에 성전에서 노래하는 대로 임명된(대상16:39;15:19;25:1,2;느12:46) 아삽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견자가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12편의 시 중 대부분을 그가 지은 것임이 분명하다.
아삽은 다윗 당시에 찬양대장이었다(대상16:5).
핵심어: 하나님의 구원.
특수어: 셀라(Selah)- 3편 특수어 해설 참조.

기(起): 하나님과 언약한 자와의 관계
1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2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3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4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5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6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

1절: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 엘로힘 예호와’의 각 단어는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낸다. 즉 첫 말은 ‘주인’,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둘째 말은 ‘강한 자’라는 뜻이다. ‘엘 엘로힘’을 붙여서 읽으면 ‘지극히 강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며, ‘예호와’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이다.
“해 돋는 데서 지는 데까지”의 표현은 우주 전체에 대한 만연체적(蔓衍體的) 유연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을 부르셨도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청각(聽覺)에 호소하고 있다.
2절: “시온에서 하나님의 빛을”- 하나님은 빛이며(시27:1;요1:5,9;8:12) 빛의 근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인간들에게 당신의 진리의 빛을 비추사(고후4:4,6) 그들로 하여금 어두움을 벗게 하시며 진리의 참된 길을 알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진리의 빛으로서 이 땅에 오사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시고 진리의 빛을 비추신 하나님이시기도 하다(요1:5,9;8:12). 하나님의 속성을 “빛”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시각(視覺)에 호소하는 표현이다.
3절: 하나님의 속성이 “불”과 “광풍”으로 열거되어 나타났다. “광풍”은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이다. 욥38:1에서 욥에게도 나타나신 하나님이다. 따라서 3절에서 시각과 청각은 물론 “불”과 “광풍”을 상징어로 동원하여 인간이 가진 모든 감각(複合感覺)에 하나님의 속성을 호소하고 있다.

  • 그러므로 1, 2, 3절에 나타난 감각적 호소는 단일감각(1, 2절)에서 복합감각(3절)으로의 점층적 강조효과를 노리고 있다.
    4절: “윗 하늘과 아래 땅”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심판을 보좌하는 대상의 상징이다. 인간들의 행위를 이들이 감찰하고 있기 때문이다(신4:26;사1:2). 심판자 하나님께서 나타나 계시는 곳이다.
    5절: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는 하나님 말씀의 인용이다. 여기에 나타난 “성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언약을 맺으신 이스라엘이다(출24:7).
    6절: 하나님께서 “하늘”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하늘은 하나님의 상징적 대유(代喩)이다.

승(承):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증언
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8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7절: “내 백성들아”와 “이스라엘아”는 호격의 동의?반복이다. “말하리라”와 “증거하리라”도 동의?반복이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임을 증거하며, “하나님”을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충성과 순종을 권면하는 말씀이다.
8절: 결과에 이어서 원인이 나타나 있다. 즉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는 결과이며,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는 원인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제사 드림을 책망치 않으신다.
9-12절: 하나님께서 우주를 소유한 주인으로서 자신의 소유를 열거하며 충만함을 나타내신다.
13절: 설의법을 이용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하려 한 행위를 책망하신다.
14-15절: 제사를 통한 간구와 응답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림에 이른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는 말씀을 사65:24의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와 연결하여 보면 더욱 큰 은혜를 경험한다.

전(轉):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16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17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18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19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20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21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16-21절: 16절의 “네가…”부터 21절의 “…베풀리라”까지 하나님 말씀의 인용이다. 인간의 범죄 사실을 열거하여 꾸짖고 책망하실 것을 경고하신다. 16-17절에서 행동으로는 죄를 지으면서 입술로만 섬기는 자들을 책망하신다. 16-17절에서 지적된 내용이 18-20절에 구체적으로 열거되어 있다.

결(結): 감사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자에게 내가 하나님의구원을보이리라
22-23절: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는 감사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들이다. 감사제사를 드리며 행위를 옳게 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른다.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서 의식종교보다는 생활종교를 강조함을 발견하게 된다. 행위에 따른 보상을 받으므로 이것은 인과응보사상(因果應報思想)이다.

기도칼럼 10
모세의 도고(禱告)
김정복 목사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 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 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출17:9-13)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르비딤에서 싸우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전쟁의 상황이 참으로 신기하다 여호수아는 나아가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서서,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가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여호수아가 지므로 모세가 피곤하매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게하고 두 사람이 양편에서 손을 붙들어 올리므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이긴 내용이다. 이 말씀은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고 도고하였고, 제사장 아론과 갈렙의 아들이며 회막 건축자중의한사람인 훌은 모세의기도를 돕는 사역을 감당하고, 여호수아는 나아가 아말렉을 대적하여 싸울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 하셔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여호수아가 승리한 것은 여호수아가 혼자 나아가 아말렉과 싸운 것이 아니요 모세의 도고가 있었기 때문이며, 모세도 혼자서 기도를 하였다면 육신을 갖고 있는 몸이라 마음은 원이로되 팔이 피곤하여 손이 자꾸 아래로 내려 올 때에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들어줌으로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이긴 것이다 우리도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항상 기도를 모으고, 기도를 합하여 서로 남을 위하여 도고 할 때에 기도의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 크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목양 칼럼 (21)
위기(危機)는 기회(機會)다
차현회 목사 (웨슬리세계선교회 회장)

아모스선지는 주전 860년대에 이스라엘에서 짧은 기간 활동한 예언자다 당시 남북으로 양단된 유대나라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각각 다른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의 통치하에서 나라가 번창 일로에 있었고, 특히 경제적으로 치부를 누리게 되었다 이로 인한 국민들의 사치와 환락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때 홀연히 나타나 망국(亡國)을 예언한 아모스의 예언인즉 정치지도자들과 종교혁신자들이 환락(歡樂)에 머물고 태평성대를 구가(謳歌)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위기일발 앞에 놓였다고 경고한 것이다(마8:11-14) 마침내 권력자와 종교지도자들은 악의(惡意)를 같이하여 아모스선지자를 추방하였다. 아모스선지는 믿음의 척도(尺度)를 가지고 옳은 진단을 내린 것이다. 아모스선지는 국가와 민족의 병태(病態)의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예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름실과(實果) 한 광주리를 아모스 앞에 보이시면서(암1:1-2) 이미 끝이 이르렀다고 경고하셨다. 인간 역사의 흥망이 경제력에 있다고 믿는 자들은 지금도 주님을 향해 이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고 시험으로 도전해 올 것이다. 이 시험 앞에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생명의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이 진리의 말씀 위에 세워진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기관들이 될 때에 국가의 장래는 불을 보듯 선명할 것이다. 흥청거리는 사회의 밑바닥에 반석으로 깔려 있어야 할 생명의 말씀이 고갈(枯渴)되어 있기에 오늘의 위기 현상은 모면할 길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왜 우리의 마음속에는 정체가 모호한 불안(不安) 의식과 위기의식으로 덮여 있는가 말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고 또 찾아본 결론은 다시말할 필요도 없이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참 평안과 희망이 그 근본으로부터 끊어진 결과가 아니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인생항로의 궤도에서 탈선된 체 파멸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위기 앞에 아모스의 예언과 경고는 우리에게 기회의 문턱으로, 바른 궤도로 옮겨 놓고 있음을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오늘의 아모스의 사명을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본다.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마닐라 새생명교회   정기환 목사

본문말씀 : 약 4:1-4?????
기도가 응답되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욕은 일반적으로 성적(性的) 욕망을 의미할 때가 많지만, 여기에서 말씀하는 정욕이란 자기를 위한,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체(members) 중에 싸움이 나는 것도 정욕 때문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 하고, 자기를 높이려 하고, 자기를 편하게 하려고 하면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합니다. 그 누군가는 희생되고 싶어 하지 않고 그러다 보면 싸움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3:15절에서 이러한 지혜(꾀)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 주위에서의 싸움이나 국가적인 싸움이나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나’를 위한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 때문에 상대를 공격하고, 나의 이익을 위해 싸우면서도 무슨 거창한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처럼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들은 정욕에서 비롯된 것이요, 마귀적인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때에 자랑하지 말라(3:14)고 충고합니다. 명분은 ‘진리’라도, 시기와 다툼을 만드는 논리는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에게 집중된 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에 기도도 하겠지만, 그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불사합니다.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해서라도 얻고자 합니다. 남을 시기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워서라도 얻으려 합니다'(4:2) 정의로운 사회란 안 될 것은 안 되고, 될 것은 되는 사회입니다. 안 될 것을 되게 하는 것은 능력이나 수완이기 이전에 정욕입니다.
그런 일들은 하나님께 기도해도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 기도를 응답해 주려면 누군가를 상하게 하고, 손해를 보게 해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도 난감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정신은 내가 손해 봄으로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하고, 내가 고난을 받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위한 삶은 세상을 닮은 행동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원수된 행동의 방식인 것입니다.
다른 교회가 잘되게 해주세요. 믿는 자들의 희생을 통해서 믿지 않는 자들이 평안을 얻게 해 주세요. 나의 수고를 통해 다른 사람이 편하게 해 주세요… 이것이 위로부터 온 지혜를 가진 자의 행동 방식입니다.

             미국 교회의 역사 (17)
                                                              이정남 목사 (본지 편집위원

1774년 7월 4일, 독립 선언 전야
1770년의 미국인구는 2,205.000명의 백인과 1,000,000 정도의 원주민 인디안이다.
신대륙 주민들은 1620년 이주 초기부터 각 지역 거주지에 영국의 의회제도를 따른 행정체계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주민들은 영국인들이 가지는 모든 기본 권리의 보장을 명확하게 선언하였다. 지난 200년 동안 식민지 의회의 동의 없이는 영국 정부에서 식민령에 과세할 수 없다는 관례를 “법과 같이” 믿고있었다. 이런 사상에 젖어있는 식민지 주민들에게 1765년 영국 의회에서 제정한 Stamp Act 반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법에 반대하는 “No Representative, No Tax” 운동은 실제로 식민지 독립 운동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영국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Puritanism 의 ”자유 [Liberty]“는 대각성 운동의 시기를 지나면서 Evangelicalism으로 계속 되었으나 이미 그 안에서는 이성주의 {Rationalism} 사상이 폭 넓게 퍼지고있었다. 그리고 독립운동 리더들인 Thomas Jefferson 이나 Benjamin Franklin의 종교적인 관점은 정통적인 Puritanism과는 거리가 먼 Deism 또는 Natural Religion [범신론 또는 자유신론 주의] 들이었다. 자유신론주의의 신조는 1, 하나님은 실재하신다. 2, 하나님께 예배드려야한다. 3, 선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께 진실한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다. 4, 사람은 죄 (sin이 아닌 wrong doing)를 회개해야한다. 5, 죽은 후에는 상급과 심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간의 죄, 구원 그리고 계시 [성경]는 언급되지 않았다. Deism은 교리에 사로잡히지 않는 이성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이성시대의 산물이었다.
이성주의 사상과 독립 운동
1648년의 웨스트팔리아 조약에서부터 1789년 프랑스혁명 까지는 현대 과학 발전의 시대이다. 식민지 지식인둘은 이성주의의 작가 중에서 Isaak Newton과 John Locke의 저서들이 많이 읽었으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리더들은 Locke의 종교적 정치적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Locke는 무엇보다도 계시를 완전 부인하지 않았고 성경의 감동과 예수의 구세주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기독교 윤리 [선을 행함] 에서 기독교의 요점을 찾았으며 독특한 기독교 윤리는 인간 이성의 명령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Locke는 “정부는 지배받을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보호하여야한다. 그리고 정부는 보호받을 사람들의 동의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부가 이 신뢰심을 상실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반기를 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Locke는 1688년 영국의 제임스 2세의 독재가 무서운 독재가 심하던 때에 일어난 명예혁명에도 참여하였다. 명예혁명의 결과 영국에는 처음으로 근대 시민 사회가 이루어진다. Locke는 입법부가 국가의 최고 권력을 가지는 의회제도와 정치권력의 기초를 국가 전체의 구성원인 국민에게 두는 국민 주권론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Thomas Jefferson은 독립선언서에서 무장 봉기 [resort arms]를 정당화하였다. 그러고 명예혁명에 참여한 Locke의 사상은 물론 Puritan의 정치사상에서도 무장 봉기 사상을 찾을 수 있었다.
독립운동 움직임과 교회
모든 교단이 영국과의 전쟁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또한 독립국가 설립에 대하여 통일된 정책을 가진 교단도 없었다. 어느 교단 안에도 1, 영국 지지파 [Tories], 2. 독립 지지파 [Patriots], 그리고 3. 독립에는 무관심한 파도 있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영국 정부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는 영국교회의 성직자들은 영국지지파였으며 남부의 영국교회 교인들은 독립을 지지하였다. 대부분의 회중교회, 장로교회 그리고 침례교회는 독립지지파였다. 역사적으로 평화주의자들인 Quakers, Mennonites, Moravians, Dunkers는 무관심하였다. 홀랜드 개혁교회와 독일 개혁교회 그리고 루터란 교회는 영국의 영구적인 통치에 이해관계가 없었다. 물론 이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중립적이었으나 대부분 독립 지지파였다. 또한 로마 카톨릭과 유대교 역시 독립 지지파에 속하였다.
1770년의 미국
1769년: Junipero Serra 신부, California 최초의 Mission인 San Diego de Alcara 설립.
그후 15년 동안에 El Camino Real (King’s Highway)을 따라 San Francisco까지 9개의 Mission을 설립하였다. 백인들의 최초 California 정착이다.
1769년: Harvard 대학은 미국에 살고있는 파충류 동물은 노아의 방주에 들어갔던 파충류 동물의 후대 (descendents)라고 결론. 이는 1655년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고 태양이 중심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받아들이었던 시기와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이다.
1777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영어성경 (신약) 발간. 신구약 전체 영어 성경은 1782년 발간.
1770년대의 조선
영조와 정조 시대이다.
조선으로서는 처음으로 민족주의 운동의 시작.
실학의 등장과 조선의 루네쌍스 시대 시작이다. 박지원 (열하일기, 허생전), 정약용 (목민심서, 경세유포), 박제가 (북학의)의 활동.

                  근본문제는 영적문제이다
                                                                           옥세철, 한국일보 논설위원

축포는 요란했다.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들이 쏘아 올려진 가운데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광장은 절정의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유럽연합(EU)을 배태한 로마조약 50주년을 맞아서다. 이 날을 위해서였나. 유럽의 싱크탱크란 싱크탱크는 저마다 바쁜 나날을 보내왔다. 21세기는 유럽의 세기다. 6개국에서 출발해 27개국 연합체가 된 EU야 말로 21세기의 세계적 수퍼파워로 부상할 것이다. 이런 담론들을 쏟아내면서다.이 담론은 ‘파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근거로 한 것이다. 미국은 분명히 제3 국가의 체제붕괴를 가져올 수 있는 군사적 파워다. 그러나 그 파워는 사회를 내적으로부터 변화시킬 수 없다. 때문에 약한 파워다.EU는 내적으로부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파워다. 경제, 정치, 사회적으로 전 세계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이 소프트파워야 말로 진정한 파워로, 유럽은 21세기의 수퍼파워로 부상할 것이다. 내로라하는 유럽의 브레인들이 펴는 주장이다.21세기의 수퍼파워가 되는 게 유럽이 맞은 ‘명백한 운명’일까. 많은 전망은 반대로 기운다. 유럽은 문제의 덩어리로, 쇠망의 길로 가고 있다는 진단이다.그 뚜렷한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해가 2005년이다. EU의 엔진역할을하고있는나라의 하나가 독일이다.이해에 독일은 사망자 수가 신생아 수를 앞질렀다. 오래 전부터의 예언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인구감소다.독일만이 아니다. 유럽 전체에 보편화된 현상이다. 유럽의 출산율은 1.4명으로 현상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2.1명에 크게 못 미친다. 이런 유럽과 관련된 빈정거림이 클린턴의 92년 대선 슬로건을 본뜬 말이다. ‘문제는 인구야, 바보야!’라는. 이 추세로 볼 때 유럽 인구는 2050년께에는 1억 이상 줄어 전 세계 인구의 6%에 불과하게 된다는 거다. 이 6%의 인구가 세계를 지배한다.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유럽이 맞은 또 하나의 딜레마는 노령화다. 일할 노동력이 없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유럽인들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벽한 사회복지 시스템이다.그 제도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개혁을 꾀한다. 그러자 대규모 소요가 발생했다. 수년 전 프랑스 전역을 휩쓴 소요는 사회복지 시스템을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신세대의 요구가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다.‘유럽 신생아의 반은 모슬렘이다. 영국에서 태어나는 남자 어린이 이름 중 가장 많은 이름은 모사드이고’-. 유럽의 모슬렘 인구는 3,000만이 넘는다. 문제는 급증하고 있는 이 모슬렘 인구 대다수가 현대화를 거부하면서 이슬람 율령에 의해 통치되는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권법 제정 이전 미국보다 더 심각한 상황을 맞고 있다.” 날로 과격화하고 있는 유럽의 모슬렘, 그리고 말뿐인 평등정책, 그 가운데 모순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을 지적한 말이다. 동시에 나오고 있는 극단의 전망은 유럽은 반(反)미 회교극렬주의의 전초기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난 50년간 유럽은 평화와 번영이라는 면에서 괄목할 발전을 이룩했다. 그리고 못 가진 자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 문화, 도덕적으로 유럽의 정체성을 지탱하고 있는 기독교 정신을 배제하고는 진정한 유럽의 통합을 이룰 수 없다.”유럽연합 50생일을 맞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한 말이다. 무엇을 말하나. 유럽이 맞은 가장 심각한 문제, 가장 근본적 문제는 ‘영적(spiritual)문제’라는 것이다. 유럽연합 50주년을 맞아 채택된 ‘베를린 선언’은 물론 EU 헌법논의 어디에도 유럽의 기독교적 근원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완전히 빠져 있다. 이를 교황이 지적한 것이다.‘유럽은 신앙이다. 신앙 그 자체가 유럽이고’-. 독일이, 또 프랑스가 있기 전에 먼저 있었던 게 유럽이다. 로마제국의 잔해 속에, 그리고 야만족의 잇단 침입 가운데 유럽이 세워졌다. 그 모태는 바로 교회다. 이런 유럽의 전통과 관련해 나온 유명한 경구다. 그 유럽이 그런데 기독교 전통과 결별하려고 있다. 이를 스스로를 부인하는 영적 위기로 교황은 본 것이다. 말하자면 기독교 전통을 벗어난 유럽의 시민사회라는게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사회가 과연 성숙한 사회인지 강한 의구심을 보인 것이다.“…유럽은 불행하게도 자칫 역사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길을 걷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축포가 요란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계속 이어진 교황의 충고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세속화로의 변화에 대해 보수 가톨릭교회의 수장이 보인 거부의 몸짓인가, 아니면 시대를 내다보는 예언인가. 어쩐지 후자로 들린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이재환 목사(Come Mission 대표, 선교사)
“중국에 교회를 세우는 데에 5,000불내지 10,000불이면 지을 수 있다.” 관심 있는 분의 헌금을 요청하는 어떤 선교단체의 광고였다. 성도들은 모이는 장소가 필요하다. 마가의 다락방도 120여명이 모일 수 있는 장소였다. 이 곳에서 최초의 교회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이 교회가 아니라 그곳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이 교회이다. 그들 머리 위에 성령이 임하였고 성령 충만 받은 성령의 공동체였다. 이들은 복음으로 인한 생명의 공동체로서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보배로운 피로 속죄함을 받음 이들이 교회이다. 이들의 머리는 예수님이요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분인 유기체로서의 교회이다.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루살렘의 거민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한번에 3,000명이 회심을 했다고 쓰여 있다. 이 엄청난 3,000명이 어디에서 모였을까? 그들은 3,000들어가는 교회당 건물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흩어진 교회였을 것이다. 이들이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다. 세월이 변하면서 건물의 필요성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당 혹은 예배당의 형태로 발전했다. 이러한 예배를 위한 집들이 어마어마한 돈을 드려 성당이 세워지고 로마의 베드로 성당 그리고 터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 같은 건물이 세워지게 되었다. 성도가 교회인 성경적 견해에서 건물 중심의 교회로 변해 버렸다. 건물 없는 성도는 가능해도 성도 없는 건물은 결코 교회가 아니다. 북아프리카의 많은 유목민들은 건물없이 아무데나 엎드리면 모스크가 될 수 있는 조건 때문에 쉽게 무슬림이 되었다. 우리는 엎드릴 필요도 없다.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만 해도 그것이 교회가 된다. 어떤 선교사는 3년 동안 그는 30개의 교회당을 세웠다고 한다. 한 달에 한 개의 교회당을 건축했다는 결론이다. 언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양육하고 성도들을 교회로 세울 수 있었을까?
우리는 교회당 건물의 건축이 교회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성도님이 회갑기념으로 선교지에다 기념교회를 세우기를 원하는 이도 있다. 교회의 창립기념으로 선교지에다 지 교회같은 교회당을 세우는 교회도 있다. 건물은 건물이다. 벽돌은 벽돌이다. 우리는 나무밑에서도 모일 수 있고 운동장에서도 모일 수 있다. 건축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필요한 곳에 건물을 세워줄 수 있다. 현지인들의 사정에 따라 지어줄 수 있다. 그들이 필요해서 지어 줄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우리가 필요해서 지어주어서는 안 된다. 건물을 지어주기 전에 우리는 건물을 지어줌으로 그들 안에 있는 진정한 믿음의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도들이 가장 아름다운 교회이며 그들이 십자가이고 진정한 건물들이다.
하나님은 교회당 건물 안에 거하시지 않으신다. 사람의 영혼안에 거하신다. 교회당 건물을 지어주는 것이 필요에 따라서 귀한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교회당 건축이 선교라는 등식이 아님을 알고 현지 성도들의 마음의 교회를 파괴할 수 있음도 인식해야 한다.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온 편지
존경하는 목사님 사랑합니다
하상기 선교사
목사님의 사랑 감사합니다.
기도학교의 가르침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기도의 소중함을 절실히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뵙고 좋은 가르침을 더 받고 싶습니다.
제 아내가? 목사님께서 러시아에서 기도학교를 하면
언제든지 목사님의 통역을 담당하고 싶다고 전해 달라 부탁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사역과 건강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귀한 사역 주님이 기뻐하시리라 확신합니다.
보내주신 책은 잘 받았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그리고 제 아내의 뱃속에서 새 생명이 자라고 있습니다…..^^
기도 부탁합니다. 목사님
?
하바롭스크 사랑교회에서
하상기, 아이딸리나, 은혜, 다윗 올림

남미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온 편지
존경하는 김정복 목사님
정금태 선교사
감사합니다
건강하신지요?
각처에 계시는 기도학교도
지면으로나마 만나게 된 것을
감사를드립니다
아름다운 기도의 열매가
많이 맺혀지길 기도합니다
?
이달도 어김없이
첫주 지난 월요일 저녁 8시부터
파라과이 기도학교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어제 밤에는 더 뜨거웠습니다
보내 주신 월간 기도책자도?잘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마치고 커피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교제도 나누었습니다
목사님 제 메일 주소입니다.
amorr1004@hanmail.net?
amorr1004@yahoo.co.kr?
jeonggp@hotmail.com입니다
임마누엘

국제 WMC 기도학교(WMC Prayer Institute International) 안내
website : www.wmcprayer.org
대표이메일 : wmcprayer@yahoo.com

  1. 미국 Los Angeles : 교장 김정복 목사 (대표)
    (213)500-0962/ E-Mail : pmpchungbkim@yahoo.com
    New York : 간사 이영창 집사 (347)245-2115 (Cell)
  2. 한국 서울 : 교장 양봉석 목사 (돋는해 교회)
    (02)888-8101/ E-Mail : holyang@hanmail.net
  3. 카나다 토론토 : 교장 정관일 목사 (토론토 가든교회)
    (416)490-9050/ E-Mail : korgarden@hotmail.com
  4. 파라과이 아순시온 : 교장 정금태 선교사, 총무 임성익 선교사
    (595)21-64-5566/ E-Mail : amorr1004@naver.com
  5. 아르헨티나 브에노스 아일레스 :
    교장 이삼선선교사, 총무 김형래선교사, 간사 이재범선교사
    (005411)4921-6376/(15)-6290-4789/sslee37@hanmail.net
  6. 인도 벵갈 : 교장 정윤진 선교사
    (91)80-2544-7542/ E-Mail : aecsiec@hotmail.com
  7. 러시아 모스크바 : 교장 이영근 선교사
    (095)426-8688/ E-Mail : rmtlee@hanmail.net
  8. 러시아 사할린 : 교장 정운 선교사
    jwsakh@hanmail.net (4242)55-0545 (ch), 73-4703 (H) 28-19-20(Cell)
  9. 러시아 연해주 :
    교장 : 양영근 선교사 (우수리스크 성서교회) rusyang@hanmail.net (8-902-554-7632)
    총무 : 전은수 선교사 jeonhara@hanmail.net (7-423-374-9191)
    간사 : 박은희 선교사
    지역책임자 : 블라디보스톡 : 최진선선교사, 정복연선교사 candre57@hanmail.net (7-4232-276925)
    아르쬼 : 전은수 선교사
    빨치산스크 : 황성국 선교사 (행정, 기록) hwangsk58@hanmail.net(7-423-630-7261)
    우수리스크 : 송병주 선교사
  10. 몽골 울란바타르 : 교장 이대학 선교사
    (976)9116-6000/(976)11-317701 E-Mail : daehaklee@hanmail.net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시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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